다시 쓰는 군산 여행

이방인이 모여 만든 도시, 전북 군산은 사람이 사람을 부르고, 서로가 서로의 품이 되어주는 여유로운 분위기를 간직한 곳이다. 실타래처럼 이어진 관계는 세월이 남긴 도시의 빈틈을 채우는 힘. 이에 기대어 원도심 일대에 매력적인 새 옷을 입히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글 유선우(@sunw_0.o)
사진 신규철 (@cozy114)


Jazz Club

원도심의 새로운 밤 풍경, 재즈클럽 머디

© 신규철
© 신규철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그늘을 드리운 건강원, 담쟁이덩굴이 뒤덮은 빨간 벽돌 건물, 향수를 일으키는 간판과 일자로 쭉 뻗은 격자형 도로. 군산의 원도심 영화동은 1899년 개항과 함께 일본의 수탈 거점으로 개발된 동네다. 해방 이후에는 항만과 미군 기지 덕분에 활기를 이어갔으나, 신시가지가 개발되면서 서서히 쇠퇴했다. 빈집과 문 닫은 점포가 늘어가던 *거리에 2025년, 재즈 클럽이 당돌하게 문을 열었다.

수시로 음악이 흘러나오는 작은 공연장은 동네의 밤 풍경을 어떻게 바꾸었을까? 재즈클럽 머디에 앉아 선율과 리듬 사이에 땀방울이 맺힌 공연을 보고 나면 그 궁금증을 풀 수 있을 것이다. 머디에는 서울 재즈 아카데미에서 재즈 피아노를 전공하고, 공연 기획 분야에서 경험을 쌓은 송성진 대표의 이력이 응축돼 있다. 뮤지션 섭외부터 그가 직접 하는데, 장르나 인지도보다 사운드의 컬러가 뚜렷한 팀이 선정의 중요한 기준. 국내에서 유일하게 라이브 녹음으로 음반을 낼 수 있는 수준의 음향도 자랑거리다. 음악을 대하는 머디의 진정성은 입소문을 타고 국내 재즈 신에 빠르게 퍼졌다. 보통 목요일에서 토요일까지 저녁 공연이 열리는데, 올해 말까지 공연 스케줄이 모두 차 있다고. 클럽 내부는 아담하다. 무대 위 뮤지션의 표정 하나하나까지 생생하게 눈에 담긴다. 공연이 이어지는 동안 점차 고조되던 열기가 연주가 끝나자마자 박수와 탄성으로 한꺼번에 터지는데, 군산이라는 도시의 잔상으로 오래도록 남을 듯한 장면이다.

@jazzclub_muddy

*구도심으로 사람들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소망을 담은 리터닝 군산(Re/Turning) 프로젝트가 2019년 이곳에서 시작됐다. 5년여의 준비 기간을 거쳐 부지에 있던 일제 시대의 양조장, 목재소, 창고 등에 재즈 클럽, 레스토랑, 스시 바, 젤라테리아, 카페, 바와 호텔이 들어섰다.

Interview with 재즈클럽 머디 송성진 대표

재즈클럽 머디 입구에 선 송성진 대표.
© 신규철

군산 토박이인지요?

제 친구들은 저를 토박이로 안 쳐주죠.(웃음) 중학교까지 여기서 나오고 고등학교는 서울에서 다녔거든요. 음악을 좋아해서 외국어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3독일로 음악 공부를 하러 갔다가 이탈리아 베네치아로 건너가서 요리를 했어요. 이후에 서울로 돌아와 예술의전당 앞에서 이탈리안 레스토랑 더바도포를 열고 10년간 운영했죠. 어느 날 고향 친구들이 소주 한잔하자 해서 군산에 내려왔다가 은파호수공원 옆에 새로 짓고 있는 건물을 봤어요. 야외 콘서트를 열 수 있겠다는 생각에 곧장 임대 계약을 하고 군산으로 돌아와 이탈리안 레스토랑 파라디소 페르두또를 오픈했죠. 그게 2010년이에요. 16년째 매년 봄과 가을에 200석 규모의 콘서트를 열고 있어요.

군산에 재즈클럽을 연 이유는요?

예전부터 ‘왜 우리나라는 재즈 클럽 같은 문화 예술 인프라가 서울에 편중돼 있을까’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일본에는 시골에도 매일 공연이 열리는 클럽이 있거든요. 지방에 재즈 클럽을 꼭 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고, 그중에서도 사람이 안 다니는 외진 곳에서 하고 싶었죠. 눈이 내리는 날 발자국 하나 없는 길가에 홀로 불을 밝히고 서 있는 재즈 클럽을 머릿속에 늘 그렸거든요. 7년 전에 재즈 클럽의 자리를 보러 다니다 만난 지금 이 자리가 딱 그랬습니다.

리터닝 군산 프로젝트를 주도하신 걸로 알아요. 재즈클럽 머디가 그 출발점이고요. 이 공간이 앞으로 군산에서 어떤 역할을 하길 바라는지요?

저는 재즈클럽 머디를 포함해서 리터닝 군산 전체를 놀이터라고 생각해요. 좋은 놀이터에는 좋은 사람들이 모이죠. 거기서 좋은 관계가 생겨나고요. 요즘 지방 인구 소멸을 막기 위해 국가 차원의 해법을 찾으려 애쓰는데, 지역 고유의 놀이 문화가 생기면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모일 거라는 확신이 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리터닝 프로젝트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궁금해요.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만 해도 이 일대에 빈집이 많았어요. 제가 친구, 후배, 지인을 꼬셨어요. 서울에 있지 말고 리터닝 군산 옆으로 와서 하던 일을 하라고요. 4프렌즈 그룹이라고 부르는 8팀이 함께하고 있어요. 재밌는 건 제가 그들을 군산으로 불렀잖아요. 이제 그 친구들이 또 다른 사람을 꼬시고 있어요. (웃음) 도시 재생의 기본이 사람이 사람을 부르는 것인데, 그렇게 진행되고 있는 거죠. 재밌습니다.

군산 분들의 반응은 어떤가요?

여기 오시는 분들의 80퍼센트가 로컬이에요. 리터닝 군산에 안 와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온 사람은 없다고들 말씀하세요. 군산을 떠나지 않아도 될 이유가 생겼다고도 하고요. 프로젝트 이름이 ‘리터닝’ 군산인 만큼 그런 얘기를 들으면 너무 좋습니다.

군산의 매력이나 가능성은 무엇일까요?

군산이 가지고 있는 태생적 DNA는 국내 어느 지역과도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100년 전만 해도 군산은 오늘날과 같은 모습이 아니었어요. 1899년에 일본이 이 지역을 개항지로 정하고 쌀을 수탈하기 위해 바다와 뻘 위에 시가지를 조성했죠. 인력이 필요하니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뿐 아니라 중국, 인천, 북한 사람들까지 모았고요. 해방 이후에도 대부분이 떠나지 않고 군산에 남았어요. 즉, 이방인들이 모여서 만들어낸 고향이 된 거죠. 제가 느끼기에 군산 사람들은 다른 도시에 비해서 문화적 수용성이 높고 외지인에게 덜 배타적이에요. 개방적이고요. 해방 이후엔 미군이 주둔하면서 영화동 일대가 위수 지역이 됐어요. 미국 클럽을 통해 들어온 음악과 패션이 이 동네에 영향을 많이 끼쳤죠. 군산만의 이러한 문화·역사적 배경은 여행자에게 충분히 어필할 만한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의 계획?

머디가 세계 어디에 내놔도 견줄 수 있는 음향과 공연 수준을 지닌 재즈 클럽으로 성장하길 바라고요. 도시의 놀이 문화를 이끄는 시작점이자, 구심점이 되기를 바랍니다. 현재는 이제 막 첫발을 내딛은 리터닝 군산 프로젝트가 앞으로 100년 동안 지속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Hotel

동네 풍경에 녹아드는 하룻밤, 호텔 인그리드

© 신규철

올해 4월, 본격적으로 여행자를 맞이하기 시작한 호텔 인그리드. 그라운드존이라 불리는 리터닝 군산 부지 내 한 면을 길게 차지한 직사각형 모양의 겨자색 호텔 외관이 멀리서도 단번에 눈길을 사로잡는다. 인그리드에는 시간이 지날수록 멋스러워지는 소재를 주로 사용했다. 외벽은 미장으로 마감하고, 인테리어에는 돌, 나무, 금속 같은 소재를 사용해 세월의 흔적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도록 말이다. 건물 한쪽의 아트리움 구조도 인상적이다. 천장 중앙에 좁은 창이 나 있는데, 비와 눈이 건물 내부로 들이치는 느낌에 반한 건축가가 원 설계도에 있던 유리를 과감히 걷어냈다. 객실 내부는 덧창에 달린 경첩 하나까지 디자인했을 정도로 디테일에 공을 들였다. 빈티지 의자와 회화 작품이 걸린 방부터 그라운드존의 담장과 동일하게 붉은색 타일로 욕실을 마감한 방까지. 객실마다 다르게 꾸민 디테일을 찾는 재미가 있다. 발코니 타입의 객실은 큰 창 덕분에 개방감이 특히 돋보인다. 햇살이 모습을 드러내는 이른 오전에 발코니에 서면 동네가 서서히 깨어나는 풍경을 마주할 수 있다. 인그리드는 수평 호텔에 가깝다. 머무는 동안 레스토랑, 카페, 바, 클럽 등 리터닝 군산의 다양한 시설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라운드존 곳곳을 누비다 보면 발걸음은 자연스레 영화동의 골목으로 이어진다. 그 덕분에 빛바랜 간판과 주민들이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나누는 정겨운 동네 풍경에 이질감 없이 스며들 수 있다.

+ 호텔에서 즐기는 나이트라이프, 바 인그리드


그라운드존 내에 자리한 바. 재즈클럽 머디와 맞닿아 있어 공연이 끝나고 난 뒤 혹은 호텔에서 쉬다가 간편한 차림새로 방문해 여행지에서의 밤을 운치 있게 보낼 수 있다. 새로 지은 것처럼 보이지만 곳곳에 역사적 요소가 숨어 있다. 1922년에 지은 적산가옥의 골조를 보존하기 위해 목재를 해체하고 재조립했으며, 일자로 길게 늘어선 원목의 바 테이블은 본 건물과 같은 해에 지은 구 조선은행 군산지점의 대들보로 만들었다고. 숙련된 바텐더가 만들어주는 클래식 칵테일과 시즈널 칵테일을 즐길 수 있다.


군산 속 작은 이탈리아, 파라디소 90 & 피쩨리아 델깜포

© 신규철

호텔을 나와 그라운드존 오른편에 자리한 건물의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자 식기가 달그락 부딪히는 소리와 대화 소리가 뒤섞여 웅웅거린다. 7파라디소 90은 송성진 대표가 재즈클럽 머디와 함께 운영하는 곳이다. 20년이 넘는 그의 요리 경력이 녹아든 이탈리안 미식을 맛볼 수 있다. 은파호수공원 앞 파라디소 페르두또에서 10년간 함께 일한 반석현 셰프가 합류해 주방을 맡았다. 직접 반죽한 치아바타로 만든 파스트라미 & 브리치즈 샌드위치와 해산물을 넣은 오일 파스타, 베네치아식 정어리 브루스케타인 치케티 사르데가 인기 메뉴다.

매장 오른편에는 송 대표의 오랜 인연이 주방을 맡은 피쩨리아 델깜포가 자리한다. 송 대표가 리터닝 군산을 준비하던 중 서울 이태원에서 피자 전문점 트레비아를 운영하던 손진아 실장에게 군산행을 권했고, 그녀는 15년가량 운영해온 가게를 접고 이곳에 새 둥지를 틀었다. 손 실장에게 붙은 별명은 도 마스터이자 반죽 장인. 이탈리아의 요리학교 8ICIF에서 수학한 후 로마의 피자학교 아 타볼라 콘 로 셰프(A Tavola con lo Chef )에서 공부한 그녀의 이력에 딱 맞는 수식어다. 델깜포의 피자는 도가 핵심이다. 이스트를 거의 쓰지 않고 밀가루 반죽을 72시간 발효시켜 소화가 잘 되고 수분감 있는 피자를 완성한다. 이탈리아식 원형 피자 톤다(tonda), 로마식 막대기 피자 팔라(pala), 밀라노식 사각 피자 텔리에(teglie)까지 도의 숙성 방식과 굽는 법을 달리한 세 종류의 피자를 맛볼 수 있다. 파라디소 90과 피쩨리아 델깜포, 어디에 자리를 잡든 두 곳의 메뉴를 한자리에서 주문해 즐길 수 있다.

@paradiso90_delcampo


Cultural Space

멈췄던 시간이 다시 흐르다,  군산회관 & 그래픽숍

© 신규철

영화동을 살짝 벗어난 이웃 동네에도 변화를 모색하는 이들이 있다. 모두에게 열린 공간. 군산회관을 한 문장으로 설명하자면 그렇다. 아이부터 반려동물까지 찾아오는 이들을 장벽 없이 환영하기 때문. 군산회관의 전신은 군산시민문화회관이다. 군산 출신이면 누구나 이 건물 앞에서 찍은 사진 하나쯤은 있을 만큼 시민들의 추억이 겹겹이 쌓인 장소다. 1989년 문을 연 이래 도시의 문화 거점 역할을 했으나, 건물 노후화와 새롭게 건립한 군산예술의전당으로 인해 2013년에 폐관했다. 10여 년간 비어 있던 유휴 공간에 새로운 변화가 시작된 건 9민간 기업 ‘커넥트 군산’이 운영을 맡으면서부터다. 김중업 건축가가 병중에 설계한 유작인 건물의 건축적 가치를 해치지 않으면서 엘리베이터를 신설해 접근성을 개선하고 아늑한 인테리어로 분위기를 탈바꿈했다. 그렇게 군산회관은 2025년 8월 시민의 품으로 다시 돌아왔다.

군산회관의 정면 입구로 들어가면 커넥트 군산의 모회사인 빈브라더스가 운영하는 카페가 반긴다. 뒤편으로 너른홀이 자리하고, 나선형의 계단을 따라 한층 올라가면 그래픽숍과 열린 라운지가 나온다. 본래 공연장이었던 너른홀은 다양한 행사 장소로 활용되는데, 특별한 이벤트가 없을 때엔 무대 위에 빈백을 두어 편히 쉬어 가는 청음 공간 콘셉트로 운영한다. 군산북페어와 토요장 등 지역의 다양한 행사와 프로그램도 이곳에서 열린다.

© 신규철

군산회관은 지역 출판사와 문화 기획사를 비롯한 단체와 함께 군산을 새로운 시선으로 담아낸 출간물도 활발히 발행한다. 그래픽숍도 이에 동참하고 있는 곳 중 하나다. 출판사 프로파간다의 김광철 대표가 운영하는 아트북 서점으로, 2023년에 리터닝 군산의 맞은편에 문을 열었다가 올해 3월 군산회관으로 이전했다. 건축을 중심으로 디자인, 영화, 예술 관련 서적을 큐레이션해 선보인다. “군산에 오기로 했을 때부터 예술 서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지방엔 이런 형태의 서점이 존재하기가 힘들거든요. 그럼에도 한 곳쯤 있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죠. 다양성 측면에서 성격이 다른 서점이 있으면 더 좋잖아요.” 서울 생활을 접고 군산에 내려온 지 이제 5년 차, 김 대표는 지역 기반의 활동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고 전한다. 이 도시에 없던 문화의 결을 하나씩 만들어가는 데 그 역시 일조하고 있다. 지역 콘텐츠를 발굴해 출판하는 것은 물론, 지역 서점을 모아 군산책문화발전소를 조직하고 2024년부터 군산북페어를 개최 중이다.

@commonzfield_gunsan, @propaganda_publishers


Café

지역 특산물의 새로운 해석, 보리당카페

© 신규철

영화동에서 신흥동 방향으로 걷다 보면 이층을 넘지 않는 낮은 집과 건물이 양옆에 펼쳐진다. 신흥동에서 가장 유명한 일본식 가옥인 히로쓰 가옥을 지나 골목길의 끝자락에 다다르면 독채 스테이 소설여행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 옆에 자리한 보리당카페는 소설여행을 운영하는 허승희 대표가 문을 연 곳이다. 대구에서 나고 자란 그녀는 조소를 전공한 예술가 고모를 따라 군산에 발을 디뎠다. 스테이 운영에 손을 보태 달라는 고모의 청에 가벼운 마음으로 찾은 동네가 마음에 들어 눌러앉은 지도 어느덧 8년이 되었다. “걸어서 책방과 카페에 가고, 대형 마트 대신 동네 정육점이나 시장에서 장을 볼 수 있어 좋아요. 동네 사람들의 바이브가 비슷해요. 큰 욕심을 부리지 않고 일상에서 소소한 재미를 찾는 이들이 많죠. 가게를 운영하는 또래들끼리도 친하게 지내고요. 소도시지만 다채로워요.” 창업을 준비하던 그녀는 스테이 손님들이 군산의 특산물을 궁금해했던 것을 참고해 흰찰쌀보리를 활용한 브랜드 보리당을 시작하고, 보리당카페를 열었다. 보리커피 드립백, 블렌딩 티백, 밀크티베이스 우유보리 등 다양한 제품을 만들며, 카페에서는 차와 커피 메뉴를 선보인다.

시그니처 메뉴는 보리커피다. 보리와 원두를 각각 로스팅한 뒤 블렌딩 해 핸드드립으로 내어준다. 익히면 찰기가 도는 흰찰쌀보리를 토핑으로 얹고, 다양한 곡물과 감잎차 등을 함께 냉침해 만드는 보리밀크티 역시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메뉴. 내부는 테이블 5개 정도의 아담한 규모지만 인테리어를 전공했다는 허 대표의 감각 덕분일까, 아늑한 분위기에서 편안하게 쉬어 가기에 좋다.

@bori.dang


Bar

안개처럼 스며드는 다정한 칵테일 바, 해무

해가 지면 영화동에는 현실과 상상, 익숙함과 낯섦이 뒤섞인다. 칵테일 바 해무는 과거와 현재의 모호한 경계가 한층 더 흐릿해지는 공간이다. 낮게 흐르는 음악, 바깥과 단절된 듯한 향, 낯빛을 감추는 조도. 영화타운 내에 자리한 해무로 들어서는 순간 아늑하고 차분하게 연출된 무대로 들어온 듯하다. 영화동과 월명동에 유독 칵테일 바가 많은데, 한국 전쟁 이후 미군을 상대로 한 상권이 이 일대에 형성되어 아직도 미국식 펍 문화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윗세대 바텐더 밑에서 경험을 쌓은 청년들이 그 문화를 잇고 있다. 해무의 최윤성 대표는 대학교 시절 칵테일 바에서 아르바이트한 경험을 바탕으로, 2019년에 자신만의 바를 열었다.

해무에선 클래식 칵테일은 물론, 메뉴판에 없는 칵테일도 취향에 맞춰 만들어준다. 청사과와 청포도의 산미가 화사하게 느껴지는 ‘사과나무포도열렸네’와 쌉싸름한 맛과 리치 향이 섞인 ‘리치게따’는 이곳의 시그니처 칵테일. 바질 향이 향긋한 베이스에 글레이즈드한 방울 토마토를 얹어 내어주는 ‘바질스매쉬’도 인기 있다. 영화 포스터와 사진, LP, 서적 등 바 구석구석을 장식한 물건에선 주인장의 취향이 엿보인다. 음악에 관심이 많아 가수를 초청해 공연을 열기도 했고, 최근에는 조향을 배우며 해무만의 향을 만들 생각이라고 한다. 하루의 끝을 붙잡고 천천히 잔을 비우다 보면 군산의 밤이 풍기는 느긋한 정취가 마음에 스며든다.

@haemoo_seafog


Interview with 해무 최윤성 대표

군산 출신인가요?

군산 사람은 아니지만 이주한 지 꽤 오래됐어요. 전라북도 장수에서 태어나 논밭을 걸어 다니면서 자랐죠. 고등학교 때 무조건 도시로 가야겠다 했는데, 서울에 갈 용기는 없었고 군산에 가고 싶은 대학교가 있어서 이 도시와 인연이 됐어요. 이제 17년 차예요. 대학교에선 시각 디자인을 전공했어요. 대학교를 졸업하고 취업해서 다른 지역에서 잠깐 지내다가 결국 군산으로 돌아왔어요.

해무를 연 계기는요?

어릴 때부터 나만의 공간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요. 구체적인 계획 없이 공간 계약부터 했어요. 대학생 때 제가 칵테일 바에서 아르바이트를 꽤나 오래했거든요. 뭐 할지 생각하다가 그때 경험을 살려 칵테일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했죠.

이름에 담긴 의미가 궁금해요.

해무는 바다 안개라는 뜻이에요. 제가 군산에 처음 왔을 때만 해도 영화동은 어르신들만 살고 계신 동네였어요. 이성당을 제외하면 알려진 여행 명소도 없었고요. 당시 영화동을 산책하면서 안개 끼는 날을 자주 경험했어요. 그 안개에서 바다 짠 내나 비릿한 냄새가 정말 많이 났죠. 제가 산이 있는 시골에서 자랐잖아요. 산에 안개가 끼면 촉촉하고 맑고 산뜻한 느낌인데, 군산의 안개는 비릿하고 찝찝한 느낌인데다 정말 짙게 드리우거든요. 그 안개가 이 동네의 쓸쓸한 정취와 너무 잘 어울렸어요. 나중에 나만의 공간을 갖게 되면 이름은 안개에 관련된 이름으로 지어야겠다고 생각했죠. 동네분들한테 들은 얘기로는 영화동 바로 옆 바다에서 피어 오른 안개가 내륙까지 덮쳐서 짠 내가 나는 거라고 하더라고요.

해무에서의 하루는 어떻게 돌아가나요?

보통 오픈 시간에 딱 맞춰서 출근해요. 요즘엔 오픈하자마자 손님이 있어서 조급한 마음으로 준비를 하죠. 군산이 혼자 여행하기 좋은 곳으로 알려지면서 처음 오는 손님이 많아졌어요. 정신 없이 일하다 보면 밤 9시, 10시가 돼 있어요. 마음 같아선 손님들과 눈을 마주치면서 여유롭게 이야기도 하고 싶은데 일하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라요. 밤 11시 이후부터 주변에서 장사하시는 분들이 마감을 하고 오세요. 친근한 분들이 오시면 한층 편한 마음으로 남은 시간을 보내죠.

군산에서의 삶은 어때요?

아직도 못 가본 동네와 골목이 많아서 여전히 새롭긴 하거든요. 요즘 군산에 좋은 공간이 많이 생겨서 더 흥미롭고재밌어요. 재밌어요. 낮에는 리터닝 군산에 생긴 트레비아를 자주 가고요. 군산회관도 종종 가요. 음향이 좋아서 음악 들으며 차분하게 작업하기 좋아요. 8월에는 군산북페어에 가고요. 디자이너 출신이니까 그런 데 가봐야 감각을 깨울 수 있거든요. (웃음)

해무에서는 어떤 칵테일을 맛볼 수 있나요?

메뉴판이 있긴 한데, 거기 적힌 건 누구나 아는 흔한 칵테일이에요. 저는 사실 사람들이 그런 걸 먹길 바라지 않아요. 칵테일을 잘 모르는 손님들에겐 보통 메뉴에 없는 칵테일을 추천하죠. 요구가 많은 손님을 만나면 실험적인 칵테일을 만들기도 하는데 오히려 그럴 때가 더 재밌어요. “제가 군산을 여행하며 받은 느낌을 칵테일로 만들어주세요.”라고 요청하는 분도 있어요. (웃음)

요즘 가장 관심 있는 건 무엇인가요?

조향 수업을 받으러 서울을 오가고 있어요. 군산이 편하고 살기 좋긴 한데, 그런 인프라가 부족한 게 아쉬워요. 다양한 직업군을 가진 젊은 사람들이 군산에 많이 왔으면 좋겠어요.

앞으로 해무가 어떤 공간이 되었으면 하는지.

공간 자체를 탐닉해 주셨으면 해요. 제가 고른 음악과 향 같은 디테일을 알아봐주셨으면 좋겠어요. 고민이 있거나 축하받을 일, 재밌는 일이 있다면 저한테 와서 얘기도 나눠 주시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