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을 빚는 여행
Finding Traditional Liquor — 술을 빚는 여행
경상북도에 자리한 지역 양조장 네 곳으로 다녀온, 1박 2일의 여행
글 허태우
사진 박신우
취재 협조 * 술술술술
* 술술술술 프로젝트는 매달 로컬 양조장을 찾아가는 1박 2일 투어를 진행하고 있다.
오미나라
문경새재로 통하는 주흘산을 뒤에 두고 자리 잡은 오미나라. 양조장 건물의 입구부터 오크통이 보이고 마당에 불쑥 서 있는 거대한 구리 증류기는 마치 오래된 설치 미술 작품 같다. 외관은 수수하지만, 이곳에서 생산하는 오미자 스파클링 와인과 브랜디는 세련된 맛으로 호평을 이끌어내고 있다. 조선시대부터 유명했던 오미자의 특산지에서 전 세계 유일의 오미자 와인이 상품화된 것이다.
“어제도 새벽까지 술을 만들다가 퇴근했어요.” 방문객에게 양조장을 안내하는 문성훈 부사장이 말한다. 그의 설명에는 오미자 와인을 만들기 위한 열정이 그대로 묻어 있다. “포도는 3~4주만 발효하면 되는데, 오미자는 발효에만 1년 6개월이 걸리고 숙성해서 와인으로 만들기까지 3년이 걸립니다. 완벽한 오미자 발효 방식을 찾기 위해 계속 연구 중이죠.” 오미나라에서는 소위 말하는 업계의 고수들이 모여 술을 만든다. 이종기 대표는 우리나라 최초의 위스키 블렌더 출신으로, 글로벌 주류 브랜드에서 오랜 경력을 쌓았다. 그는 스코틀랜드에서 위스키를 공부할 때, 한국의 농산물로 만든 제대로 된 술을 만들어야 한다는 자극을 받았다고.
다섯 가지 맛을 낸다는 오미자의 당도는 약 12브릭스. 사이다 정도의 당도지만 시고 쓰고 짜고 매운 맛이 더해져 실제로 단맛을 느끼기 어렵다. 이를 발효해 적당한 단미를 풍기는 와인을 만드는 게 오미나라의 과제. 오미나라는 문경 동로 지역에서 생산한 유기농 오미자를 사용하며, 밸런스를 잘 살린 스파클링 와인은 물론 스틸 와인과 브랜디도 선보인다.
시음장에서는 오미나라가 양조하는 모든 제품을 맛볼 수 있다. 오미자 와인의 높은 가격대와 소규모 유통망을 생각하면, 놓치기 아쉬운 기회. 문성훈 부사장이 스파클링 와인부터 낮은 도수 순서로 시음을 제안한다. * 오미로제 연과 결은 핑크 빛깔에 선명한 기포, 신맛과 단맛의 밸런스가 돋보인다. 가볍게 즐기기 좋은 와인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고. 오크통 대신 백자 항아리에 숙성한 고운달 브랜디는 높은 도수에도 불구하고 부드러운 목 넘김과 오래 지속되는 향이 매력적이다. 오랜 숙성의 시간으로 맺은 오미나라의 결실은 시음이 끝나도 다시 한번 잔을 채우게 이끈다.
* 오미로제 연은 ‘2022 대한민국 주류대상’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브랜드에게 수여되는 한국 와인 부문 Best of 2022을 받았다. www.omynara.com
문경주조
문경시 동로면을 가로지르는 금천 변으로 한갓진 동네의 분위기가 나른하게 퍼진다. * ‘주담정’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문경주조의 솟을대문을 넘자 술 항아리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숙성을 고려해 유약을 바르지 않았다는 항아리에는 술 종류와 발효 기간이 써 있다. 2007년 설립한 문경주조는 현대적 으로 변주한 전통주로 입지를 다지는 양조장이다. 전통 생막걸리부터 오미자 막걸리, 탁주, 탄산 약주, 쌀맥주 등 다채로운 술이 이곳에서 탄생했다.
문경주조 시음실의 테이블에 식사와 시음이 준비된다. 시작은 가벼운 오미자 생막걸리와 탄산 약주 오희부터. 오미자 생막걸리는 과실을 넣어 주조한 첫 번째 막걸리로, 새콤한 맛이 은은하게 감도는 게 색다르다. 탁주에 오미자를 첨가한 후 발효한 오희는 스파클링 와인 같은 전통주다. 천연 탄산이 입안에 퍼지는 깔끔한 맛이 식전주로 잘 어울린다. 여기까지는 입맛을 돋우는 술이었고 본격적으로 전통주를 마실 차례. 문경주조에서 직접 만들었다는 손두부와 김치를 안주 삼아 다시 시음이 이어진다. 유기농 햇찹쌀과 전통 누룩으로 100일간 발효한 ** 삼양주인 문희와 문희에서 맑은 술만 떠내어 2년간 더 숙성했다는 맑은 문희주다. 문경주조를 대표하는 두 술인데, 특히 맑은 문희주는 은은한 단맛과 깔끔한 뒷맛이 빼어나다. 한 끼 식사가 끝나갈 무렵, 2020년부터 생산했다는 쌀 맥주로 시선이 쏠린다. 막걸리에 직접 재배한 홉을 첨가해 만든 폭스앤홉스다. 문경에서 이곳 양조장까지 오려면 여우 고개를 넘어와야 해서 붙인 이름이라는데, IPA와 비슷한 묵직한 맛과 홉향이 혀와 코를 자극해 식사의 마무리로 제법 어울린다.
* 酒談停. 술과 이야기가 있는 곳이라는 뜻이다.
** 밑술에 두 번의 덧술을 넣어 빚는 전통주을 삼양주라고 부른다.
맹개술도가
안동시 도산면의 낙동강 상류를 트렉터로 건넌다. 마치 육지 속의 섬처럼, 굽이치는 강물을 두른 땅자락의 맹개마을에 들어가기 위한 과정이다. 수량이 불어나는 여름철엔 이도 여의치 않아 배를 타고 건너야 한다. 맹개마을은 퇴계 이황의 시구에도 언급될 만큼 아름답고 낭만적인 풍경을 자랑하며, 맹개술도가 진맥소주의 원료로 쓰이는 * 밀이 이곳에서 자란다.
맹개마을은 농사를 짓고 손님을 맞이하는 곳이다. “원래 밀 농사만 했죠. 간간히 주변 농가에서 기르는 농산물을 함께 팔기도 했고요.” 2007년 여기에 내려와 맹개마을을 일군 박성호 이사가 설명한다. “증류주를 처음 만들어보니 호응이 좋아서 점점 인기가 높아졌어요. 이제는 생산량이 주문을 못 따라갑니다. 완전 자동화로 생산하기에는 규모가 작아서 아직 수작업으로 양조하죠.” 실제로 맹개술도가의 술은 도산면 읍내의 양조장에서 생산한다. 맹개마을에서는 재료가 되는 밀을 재배하고 술을 숙성시키는 것. 안동시 전체에서 * 안동 소주를 만드는 양조장은 9곳인데, 맹개술도가만 유일하게 밀로 소주를 양조한다. 조선시대 음식 조리서 〈수운잡방〉에 소주를 밀로 빚었다는 내용이 나오니 밀 소주의 역사는 의외로 길다.
* 일반적으로 소주의 주 원료는 쌀이고, 안동 소주도 마찬가지다.
숙소인 소목화당에 짐을 풀고 맹개마을을 천천히 둘러본다. 강변에는 백사장이 펼쳐지고, 그 너머에 청량산의 절벽이 솟아 있다. 풍경을 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놓인다. 밀밭의 규모는 10헥타르에 이르는데, 초여름 수확 직전의 밀밭은 또 다른 싱그러운 풍경을 만든다고. 산책 후에는 저녁 식사와 시음이 기다린다. 맹개술도가의 ** 진맥소주는 22도부터 57도까지 도수와 숙성 방식에 따라 몇 가지로 나뉜다. 일반 진맥소주는 향긋하고 알싸한 밀향과 소주답지 않은 깔끔한 맛이 장점이다. 오크통에 숙성한 캐스크 스트렝스 57도 제품은 *** ‘더 락’이라는 별도의 라벨을 붙였는데, 맹개술도가의 야심작이라 할 수 있다. 정식으로 출시되기도 전에 올해 생산분이 전부 판매됐을 정도로 인기다.한 모금만 맛봐도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싱글 몰트 위스키에 버금가는 곡물향과 오크향, 균형 잡힌 보디감, 부드러운 뒷맛이 일품이다.
** 53도 진맥소주와 오크 숙성 진맥소주는 2020년 샌프란시스코 국제주류 품평회에서 가장 우수한 출품작에 수여하는 더블골드 메달을 받았다. : 진맥소주
*** 맹개마을 앞 강줄기 한가운데, 퇴계 이황이 ‘경암’이라고 이름 붙인 바위가 하나 불쑥 튀어나와 있다. 이 바위에 물이 부딪혀 모래가 실려와 맹개마을의 독특한 백사장을 이룬다.
농암종택
물 위에 술을 띄우고 시를 지으며 마시는 유상곡수(流觴曲水)는 조선 시대의 풍류 문화였다. 선비의 고장이라고 불리는 안동에는 * 농암 이현보와 퇴계 이황이 낙동강 한 줄기에 술잔을 띄우고 유상곡수를 즐겼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청량산 자락의 농암종택은 그 풍류 문화의 이야기와 실체를 경험해볼 수 있는 곳이다.
“술은 음식 문화의 종착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농암종택의 17대 이성원 종손이 말한다. 그는 한복을 차려입고 정정하면서도 유쾌하게 외지인을 맞이해준다. “종가집은 인문학을 하는 곳이지, 제조업을 하는 곳이 아녜요. 그런데 종부인 아내가 다른 곳에서 가양주를 마셔 보니, 종가의 술이 맛있다고 확신하더군요. 그래서 술을 만들어보기로 했죠.” 650년을 이어온 안동 명문가 의 술, ** 일엽편주는 그렇게 세상에 나왔다.
종택의 멋들어진 한옥을 보며 마당을 거닐다 평상에 앉아 일엽편주를 시음한다. 대대로 내려온 방식에 따라 누룩을 직접 밟고 100일간 발효해 수작업으로 주조한 것이다. 탁주, 청주, 소주로 나뉘며 시기에 따라 꽃술도 낸다. 그중 가장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술은 청주다. 쌀의 달콤함과 누룩에서 나온 과일향이 조화를 이루어 입안에 다양한 맛을 감돌게 한다. 탁주 보다 상미기간(6개월)이 길어 오래 두고 마시기에도 좋다. 퇴계 이황의 글씨를 활용한 라벨과 전통미를 살린 고급스러운 패키징은 또 하나의 차별 요소. 일엽편주야말로 가장 동시대적인 종가집의 가양주가 아닐까 싶다.
* 농암 이현보(李賢輔, 1467~1555)는 문장에 뛰어났던 문신이자 학자다. 15관직을 버리고 고향에서 돌아와 퇴계 이황, 금계 황준량과 교류하며 여러 시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