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아이다호의 야생 속으로
아이다호의 주도 보이시는 미국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며 미국 최고의 여행지로 주목받고 있다.
Your Own Private Idaho — 미국 아이다호의 야생 속으로
어떤 지명에는 그림자처럼 특정 이미지가 따라다니고, 환상인 줄 알면서도 그것에 매달리는 여행자가 있다. 지역보다 동명의 영화가 먼저 떠오르는 경우라면 더 그렇다. 미국 북서부, 캘리포니아, 네바다, 몬태나에 접한 아이다호주는 감자로 유명한 농업 지역이자 치솟는 집값을 피해 캘리포니안이 이주해오는 곳이고, 정치적으로는 공화당이 득세한 주다. 아이다호를 여행하려는 사람이라면 웬만한 곳을 다 가봤거나 아니면 다소 마이너한 성향일 가능성이 높다. 삶의 질이 높기로 손꼽히고 자연 풍광도 아름답지만 뾰족한 명물이 있는 건 아니니까.
아이다호의 본질을 이루는 건 인간의 부재다. 160만 헥타르에 달하는 야생 지역이 주의 중심에 펼쳐져 있다. 미국의 야생 지역 보호법은 야생 지역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인간에 의해 구속받지 않는 땅과 생명 공동체. 인간은 그곳에 거주하지 않으며 단지 방문자인 곳.’ 아이다호의 주도 보이시에서 출발해 야생 지역 가까이로,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이끌렸던 야생의 땅으로 자동차 여행을 떠나보자. 보이시에서 소투스 국유림을 통과하여, 헤밍웨이가 자취를 남긴 케첨과 선 밸리까지 약 4시간 거리다.
보이시
Boise




나는 노란 발삼루트 꽃이 핀 캐멀스 백 공원(Camel’s Back Park)의 언덕 위에서 아이다호주 의사당이 솟은 시가지를 바라본다. 프랑스어로 나무를 뜻하는 이름에 걸맞게 보이시의 다운타운은 숲과 초지에 둘러싸여 있다. 보이시에는 이곳을 포함해 100개가 넘는 공원이 있다. 2018년 무렵에 포브스, 론리플래닛 등의 매체는 보이시를 미국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도시이자 미국 최고의 여행지로 주목했다. 첨단 기업 친화적 도시, 밀레니얼 세대가 살기 좋은 도시로 꼽히기도 했다고.
도시 북부를 감싸는 산등성이까지 긴 하이킹을 이어갈 수도 있지만, 차로 5분 떨어진 다운타운으로 복귀한다. 다운타운은 걸어서 돌아보기 좋은 규모다. 8번가를 중심으로 몇 블록에 걸쳐 마이크로브루어리와 탭 룹, 사이더리, 팜 투 테이블 레스토랑이 모여 있다. 8번가와 9번가 사이는 프리크 앨리 갤러리(Freak Alley Gallery)라 불린다. 이제껏 세계 각국에서 온 작가와 일반인 200여 명이 골목과 주차장에 마음껏 그라피티를 그렸고, 작품 목록은 꾸준히 업데이트되는 중이다. 몇 블록 건너에는 북미 최대 규모의 바스크 지역 사회의 중심인 바스크 지구(The Basque Block)가 위치한다. 가족을 중시하는 바스크 문화에 걸맞게 더 바스크 마켓(The Basque Market) 앞에선 매주 두 번, 대형 솥에 40인분의 바스크식 파에야를 조리한다. 맛 좋은 냄새가 날 즈음이면 접시를 든 손님이 줄을 선다.

다운타운의 모던 호텔 앤드 바(Modern Hotel and Bar)는 보이시의 모순적 성격을 축약한 듯하다. 로비에는 곱슬머리의 바스크계 여성 셋을 찍은 흑백 사진이 걸려 있다. 대공황 시절의 바스크인 하숙집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곳의 역사를 담은 사진이다. 하숙집 여주인의 손녀는 미드 센추리 모던(Mid–century Modern) 디자인 붐을 적절히 활용해 이곳을 개조하고 ‘모던’이라는 이름을 붙여 다시 열었다. 객실에서 39번 채널을 틀면 연속 상영하는 각국 단편영화 39편을 볼 수 있고, 호텔 조식 식당은 저녁이면 팜 투 테이블 레스토랑으로 변신한다. 아이다호에서 가장 흔한 나무인 더글러스 자작나무(Douglas Fir)나 바랑코(Barranco, 화구뢰) 같은 자연 친화적 이름의 칵테일을 마시면서 앞으로의 여정을 상상해보자.
스네이크 리버 밸리
Snake River Valley


보이시의 팜투테이블 레스토랑과 파머스 마켓에 도사린 지역 식자재의 근원은 가까운 곳에서 찾을 수 있다. 보이시 시내 서쪽, 가든 시티(Garden City)는 한때 낙후된 거주지였지만 근래에 재건 사업으로 활기를 되찾고 있다. 보이시강(Boise River)변에 조성된 보이시 리버 그린벨트(Boise River Greenbelt)를 따라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시내에서 금세 닿는 이곳만 해도 지역 와이너리와 브루어리가 몇 군데 있다. 계속해서 서쪽으로 30분 정도 차를 몰면 서니슬로프 와인 트레일(Sunnyslope Wine Trail)에 도착한다. 이곳은 아이다호주 남서부와 오리건주 동부를 포함하는 스네이크 리버 밸리 AVA(Snake River Valley AVA)의 일부로, 와이너리 10여 곳을 아우른다. 해발 700~900미터 고도의 서니슬로프 구릉 지대는 화산토와 더불어 여름에도 저녁은 서늘한 고지대 사막 기후를 갖춰 포도 재배에 적합하다. 사실 이곳에선 1860년대부터 포도를 심었다. 태평양 연안 북서부에서 최초였다.



1981년 시작한 비트너 비니어즈(Bitner Vineyards)는 서니슬로프에서 가장 오래된 포도밭 겸 와이너리 중 하나다. 테이스팅 룸이 위치한 작은 목조 주택이 넓게 뻗은 구릉과 스네이크강 협곡을 굽어본다. 양봉 생물학자이자 아이다호 출신인 대표 론 비트너(Ron Bitner)는 이 풍경에 반해 땅을 매입했는데 마침 이웃이 이 지역의 첫 와인 양조자였다. “이곳의 환경이 스페인 북부 라리오하(La Rioja)와 유사하다고 하더군요.” 그는 이웃의 조언에 따라 포도를 심기 시작했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비트너 가족의 친구이자 지역의 유명 양조자 그레그 코니그(Greg Koenig)와 협업해 소량 양조하는 이곳 와인은 이제까지 여러 차례 수상을 했다. 비트너는 전공을 살려 화학적 방법 대신 이로운 곤충을 활용하는 방식으로 카베르네 쇼비뇽, 메를로, 시라즈 등을 재배한다. 덕분에 이곳은 지속 가능한 방법으로 생산한 와인에 부여하는 LIVE 인증과 비 프렌들리 파밍(Bee Friendly Farming) 인증을 받은 아이다호의 유일한 와이너리가 되었다. 테이스팅 룸을 나서던 장년 남성이 “이게 아이다호의 삶이지!”라고 중얼거리는 말이 들린다. 진부할지라도, 이곳에 적절한 문장이다.
소투스 국유림
Sawtooth National Forest



보이시에서 북동쪽 소투스 국유림으로 가는 길은 단 하나, 21번 주립 고속도로뿐이다. 이 도로는 1860년대 보이시와 금광 지역 사이를 연결하던 길에 기원을 두고 있다. 보이시 국유림(Boise National Forest)의 급류에서 카야킹하는 이들을 지나 고속도로에 진입한다. 표지판에는 21번 주립 고속도로의 또 다른 이름인 폰데로사 파인 경관도로(Ponderosa Pine Scenic Byway)가 쓰여 있다. 헤밍웨이를 닮은 남자가 나귀를 끌고 소나무 숲을 걸어가는 그림과 함께. 폰데로사 소나무를 비롯해 키 큰 침엽수가 점차 풍경을 지배한다. 3,000미터급 봉우리 50여 개가 솟은, 로키산맥의 일부인 소투스산맥(Sawtooth Mountains)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다섯 살 때 처음 총 쏘기를 배운 이래로 자연과 사냥 애호가였던 헤밍웨이는 삶의 마지막 20년 동안 아이다호를 오가다가 결국 이곳에 정착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이 시험관에서 태어나 기계처럼 생각하지 않는 한, 이 모든 것을 머릿속에 새겨 넣고 절대 잊지 않게 될 것이다.” 그 풍경은 지금도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그처럼 잘 보존된 덕분에 소투스 국유림과 보이시 국유림에 걸친 160만 헥타르의 땅은 야생 지대로 지정되었다. 야생 지대에선 자동차와 자전거를 포함한 운송수단이 일체 금지되고 기구가 없는 액티비티만 가능하다. 국제 밤하늘 협회(IDA)가 미국의 첫 밤하늘 보호구역으로 선정한 곳이기도 하다. 그 말인즉 운전 중 라디오나 휴대전화 신호가 끊겨도 당황하지 말 것 그리고 차량 연료와 식량을 미리 챙길 것을 의미한다. 주유소는커녕 100킬로미터 넘게 달려도 마주치는 건 도로변 목초지의 소떼 정도 정도가 전부일 테니 말이다.


소투스 국유림 깊숙이 진입하자, 만년설을 뒤집어쓴 산등성이가 저 멀리 모습을 드러낸다. 소투스라는 이름대로 톱니 이빨처럼 뾰족뾰족한 형상으로. 소투스 야생 지대의 관문이라 불리는 마을 스탠리(Stanley)에 이르면 도로는 75번 주립 고속도로와 맞닿는다. 인구가 100명이 되지 않는 스탠리는 낚시, 수영, 클라이밍, 하이킹 등 액티비티를 즐기기 좋은 곳이다. 오래 머물지 않더라도, 잠시 차를 세우고 근처의 레드피시 호수(Redfish Lake)로 짧은 하이킹을 떠나야 마땅할 것이다.
선 밸리
Sun Valley


스탠리에서 남동쪽으로 1시간여 달려 선 밸리 로지(Sun Valley Lodge)에 도착한다. 1930년대, 유니언 퍼시픽 철도(Union Pacific Railroad)는 미국 최초의 스키 리조트를 개발하기 위해 미 서부를 샅샅이 뒤진 끝에 당시 광산 마을이던 케첨 옆 초지를 낙점했다. 이윽고 1936년 선 밸리 로지가 문을 열었고, 곧 수많은 유명인사가 찾는 고급 휴양지가 되었다. 2015년에 리조트를 전면 레너베이션했지만 콘크리트를 목재로 보이게끔 가공한 특유의 외관과, 검박하고도 고급스러운 분위기는 여전하다. 전기난로를 갖춘 응접실이나 뛰어올라가야 할 만큼 거대한 침대처럼. 선 밸리의 매혹은 야생 지대를 지척에 두고 이처럼 안락한 현대성을 구현한 데 있으리라. 사실 90여 년 전 처음 열었을 때부터 선 밸리 로지는 일관되게 현대성을 지향했다. 전 세계 최초의 체어 리프트 그리고 호키포키(hokey–pokey) 춤이 여기서 탄생했다.


1939년, 선 밸리 로지가 초청한 유명인사 중 한 명이었던 헤밍웨이는 이곳 우드 리버 밸리(Wood River Valley)의 자연에 심취했고 이후 20여 년에 걸쳐 틈틈이 찾았다. 리조트 홍보용 사진을 촬영하는 조건으로 그는 스위트 룸 206호에 언제든 투숙할 수 있었다. 그때마다 호텔 창립자 애버렐 해리먼(Averell Harriman), 배우 개리 쿠퍼(Gary Cooper) 같은 이들과 어울려 사냥을 떠나고, 인근 케첨의 단골 바 카지노(Casino)에 드나들었다. 말년에 헤밍웨이는 아예 선 밸리 로지를 지은 건축가에 의뢰해 호텔에서 도보 거리에 주택을 지었는데, 집이 거의 선 밸리 로지의 객실과 다를 바 없을 정도였다. 그는 그곳에서 생의 마지막 2년을 보냈다.
선 밸리 로지는 리조트를 찾은 무수한 유명인사 중 몇몇의 이름을 딴 스위트 룸을 운영한다. 매릴린 먼로(Marilyn Monroe), 클린트 이스트우드(Clint Eastwood) 그리고 물론 헤밍웨이도. 헤밍웨이의 오랜 팬이기도 한 마케팅 디렉터 마이크 피츠패트릭(Mike Fitzpatrick)의 안내로 헤밍웨이 객실을 둘러본다. 실내는 헤밍웨이 단행본, 타자기, 친필 편지 등으로 꾸몄고, 전면 창으로 보이는 산맥 풍경이 보는 이를 압도한다. 피츠패트릭은 헤밍웨이가 객실 전면 테라스의 선베드에 누워 타자기로 작업을 했다고 설명한다. 저 야생의 풍경이 작가의 내면과 감응했으리라 짐작해본다. 천부적인 이야기꾼의 소질과, 꼭 필요한 단어만을 사용한 언어적 감각과, 사냥한 동물은 무조건 다 먹어 치우던 책임감 내지 습관 같은 것과 말이다.
케첨
Ketchum


케첨 공동묘지(Ketchum Cemetery)에서 헤밍웨이 묘지를 찾는 법은 ‘병을 따라가는 것’이다. 십중팔구 조니 워커 빈 병 같은 것이 애주가였던 작가의 묘지 위에 놓여 있을 테다. 더불어 〈노인과 바다〉 페이퍼백과 볼펜 여러 자루, 동전들 그리고 발삼루트 꽃 몇 송이도. 보이시의 캐멀스 백 공원에도, 소투스의 초지에도 피어나는 이 야생초를 프레리의 가축들이 먹고 자란다고 한다.


파리, 키웨스트, 아바나, 세렝게티 그리고 아이다호까지. 헤밍웨이는 지구 곳곳에 족적을 남겼다. 혹자는 헤밍웨이가 작품을 쓸 때마다 거주지를 옮겼다고 말한다. 실제로 키웨스트에서 〈무기여 잘 있거라〉를 완성한 헤밍웨이는 케첨으로 거주지를 옮기며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본격적으로 집필하기 시작했다. 선 밸리 로지 근처에는 헤밍웨이 하우스(Hemingway House)가 있다. 헤밍웨이 부부는 빌트인 텔레비전을 비롯한 첨단 시설을 갖춘 이 집에 지인들을 자주 초대했다고 한다. 1961년 어느 여름날 아침, 헤밍웨이는 현관에서 엽총으로 관자놀이를 쏘았다. 건강 악화와 편집증이 원인으로 알려져 있다. 아내 메리는 그 장소를 폐쇄하고 반대쪽에 새로 현관을 냈다. 일반인은 집안 출입이 금지돼 있지만, 예전 그대로 보존해놓은 실내를 창 너머로 훔쳐볼 수 있다. 집 주변을 둘러싼 산등성이에 엘크 몇 마리가 거닌다. 허리 통증 때문에 선 채로 타자기를 두드리는 동안, 그가 바라보았을 산악 지역에는 이제 헤밍웨이 볼더스 윌더니스(Hemingway–Boulders Wilderness)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헤밍웨이가 단골이던 카지노 바 옆 워필드 디스틸러리 앤드 브루어리(Warfield Distillery & Brewery)에서 저녁 식사를 하기로 한다. ‘어제의 수프’와 대구 요리를 주문하면 웨이터는 각 식자재를 공수한 산지와 농장을 알려준다. 지역산 유기농 식물로 제조한 노 리턴 진(No Return Gin)을 넣은 칵테일을 곁들인다. ‘노 리턴’은 소투스 국유림 북부의 야생 지대 이름이기도 하다. 식사는 훌륭했고, 식당은 점차 시끌벅적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