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섬나라의 섬, 인도네시아 바뉴왕이

케미란 빌리지에서 바뉴왕이 여행을 시작해보자. 이 마을은 바뉴왕이에 거주하는 블람방안 왕국의 후예, 오싱 부족의 전통을 간직한 곳이다.

허태우
2021.05.26
댓글

Banyuwangi, island in the islands — 섬나라의 섬, 인도네시아 바뉴왕이

1만7,500개가 넘는 섬, 혹은 하나의 나라 인도네시아. 이 나라에는 섬과 섬을 중심으로 문화와 전통과 왕국이 흥망성쇠를 거듭했다. 자바섬 동쪽 끝에 자리한 바뉴왕이(Banyuwangi)처럼 말이다. 동명의 도시를 중심으로 형성된 바뉴왕이는 발리 해협에서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이 더위를 식혀주는 곳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레 확장된 시가지에서는 신호등 없는 교차로가 빈번히 등장하고, 허름한 건물 옆으로 번듯한 쇼윈도를 뽐내는 휴대폰 매장과 무선 와이파이를 제공하는 노천 식당이 자주 눈에 띈다. 수십 년의 변화를 단 시간에 소화한 동남아시아의 지방 소도시와 일견 다를 바 없지만, 그 속에는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글 허태우
사진 김주원

케미란 빌리지
Kemiran Village

© 김주원
© 김주원
© 김주원

“저희 마을은 근대화에 맞춰 발전했지만, 전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서로 협동하며 함께 생활하는 전통이죠. 마을 사람 누군가의 집에 대소사가 생길 때마다 모두 도와주러 가요.” 케미란 빌리지에서 만난 수하우미(Suhaumi)가 설명한다. 그는 오싱(Osing) 부족의 지긋한 어른이다. 오싱은 주로 바뉴왕이에 거주하는, 블람방안(Blambangan) 왕국의 후예라고 할 수 있다. 이곳 케미란 마을에만 2,500여 명이 모여 살고, 자바섬 전체에는 30만 명이 넘는 이가 거주한다고 알려져 있다. 오늘날 케미란 빌리지는 오싱의 전통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여행자에게 전달하며 명맥을 잇는다. 전통 가옥에 머물면서 현지 가정식을 먹고, 전통 춤을 배울 수 있다.

오싱은 블람방안의 흥망성쇠에 따라 역사의 고난을 견뎌왔다. 원래 힌두교를 신봉했지만, 이슬람에 의해 강제로 종교를 바꿔야 했고, 네덜란드 식민지 시절엔 수많은 부족민이 학살당하다시피 했다. 그 지독한 역사를 온전히 감내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변방의 사람들로서는 더 더욱. 수하우미가 담담하게 말을 잇는다. “저희 부족에겐 환영의 인사가 따로 없어요. 네덜란드가 점령했을 때, 모든 부족이 숲속으로 뿔뿔이 흩어져 도망 다녀야 했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이 들어왔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외지인을 믿을 수 없었고 그들을 환영할 수도 없었으니까요.”

케미란 마을 사람들은 번드레한 환영의 인사 대신에 춤으로 방문객에게 마음을 표한다. 그들의 혼을 실은 간드룽(gandrung) 춤이다. 흔히 간드룽을 발리의 전통 춤으로 여기지만, 바뉴왕이 또한 ‘간드룽의 도시’라고 불릴 만큼 이 춤에 깊은 애정을 지닌다. 오싱족의 간드룽은 여성 댄서인 스블랑(seblang)이 주인공이다. 간드룽 댄서는 화려한 의상을 차려 입고 가믈란(gamelan)의 전통 선율에 몸을 맡긴 채 초월적인 동작에 빠져든다. 처음 보는 관객들도 그 사위를 한번 목격하면 기묘한 감흥에 동화되고 말 것이다.

© 김주원

이젠 화산
Kawah Ijen

© 김주원
© 김주원
© 김주원

새벽 1시를 막 지난 시각. 이젠 화산(Kawah Ijen)의 입구는 사람들로 꽤나 부산스럽다. 이젠은 인도네시아에서 브로모(Bromo)와 더불어 가장 잘 알려진 화산이다. 마지막 분화는 1999년었다. 그후 별다른 폭발의 징조는 없었지만, 사람들은 이 산을 너나 없이 바라보고 있다. 현지인은 유황을 캐기 위해, 외지인은 ‘블루 파이어(blue fire)’라 명명된 자연현상을 찾기 위해.

수백 명의 사람이 줄지어 이젠을 오른다. 등산로의 경사는 가파르고 드센 바람이 주변에 몰아친다. 약 1시간을 거칠게 오르니 주변 시야가 트인다. 검푸른 밤하늘에는 별무리가 우수수 쏟아지듯 반짝이고, 그 아래로 등산로를 따라 길게 헤드 랜턴의 행렬이 이어진다. 이젠 화산의 정상부까지 부지런히 오르면 약 1시간 30분 만에 닿는다. 능선에 불어 닥치는 바람은 유독 드세다. 해발 2,500미터를 넘는 산이니 그럴 만도 하다.

정상부에서 내려다보면 저 아래 짙은 호수가 거대한 분화구를 차지하고, 헤드 랜턴 행렬의 끝에서는 푸른 불길이 유황 가스를 내뱉으며 타오른다. 블루 파이어 주변은 인산인해다. 유황 가스가 몇 미터 앞을 제대로 못 볼 정도로 뒤덮이지만, 방독면을 착용한 여행객들은 마치 외계를 탐험하듯 이리저리 움직이며 블루 파이어를 카메라에 담는다. 가스 사이로 불길이 치솟을 때마다 사람들은 낮은 감탄사를 내뱉는다. 유황 가스로 발화돼 섭씨 600도까지 타오르는 푸른 불꽃은 ‘불타오른다’는 표현을 새롭게 규정하는 것 같다. 반면 이 혼란 속에서도 현지 광부들은 묵묵히 유황을 캐고 운반한다. 누군가에게는 일생일대의 볼거리가, 누군가에게는 힘든 작업 환경에 불과할 뿐이라는 상황이 아이러니하다. 어둠이 잦아들고, 블루 파이어를 기억에 저장한 사람들이 점차 사라질 때쯤, 이젠은 또 다른 황홀한 풍경을 꺼낸다. 서서히 핑크 빛에서 푸른빛으로 변화하는 하늘과 에머랄드빛 칼데라호, 암벽의 장막이 빛을 자르며 그린 명과 암. 이젠은 속살을 모두 드러내어 사람들을 붙잡는다. 가슴 뭉클하도록 오랫동안.

발루란 국립공원
Baluran National Park

© 김주원
© 김주원
© 김주원

“이렇게 다채로운 자연환경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은 별로 없을 거예요. 인도네시아에서도 바뉴왕이뿐이죠.” 가이드 앤디(Andi)가 발루란 국립공원에 들어가며 이야기한다. 자바섬 동북쪽 끄트머리를 차지한 국립공원의 매표소에는 ‘작은 아프리카’라는 홍보 문구가 써 있다. “이른 새벽에 와야 표범을 발견할 수 있는데, 지금은 어렵겠네요. 아, 원숭이는 조심하세요. 먹을 거라면 다 훔쳐가버려요.”

건조한 수풀 사이로 뚫린 길은 사바나 평원으로 일행을 인도한다. 빛 바랜 대지는 누런 잡초와 우산처럼 가지를 펼친 수목 그리고 몇몇 야생동물의 터전이다. 작은 아프리카를 상상하며 사람들이 열심히 셀피를 촬영하면서 한눈을 파는 사이, 자바원숭이가 종종걸음으로 도로변에 세운 자동차로 접근한다. 혹시나 과자 부스러기는 없는지 살펴볼 요량인 것 같다.

사바나 평원과 발루란산이 포개지는 배경 속으로 반텡(banteng) 한 마리가 답답할 정도로 느리게 걸어가더니 늪에 빠져 허우적댄다. 혹시나 걱정되어 물이 고인 늪을 향해 몇 발자국 다가갈 찰라, 공원 직원이 제지한다. “가만히 두는 게 좋아요 오히려 사람의 때가 타면 동물이 물을 찾으러 늪에 오지 않으니까요.” 자연의 생리를 괜히 걱정할 필요는 없다. 육중한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던 반텡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늪을 빠져나와 느린 걸음을 이어간다.

발루란 국립공원의 해변은 사바나와는 전혀 다른 생태를 숨기고 있다. 공원 내 바마 해변(Pantai Bama)으로 이동해 자바원숭이를 찾는다. 이곳에 서식하는 자바원숭이는 평탄한 파도가 밀려드는 해변의 백사장을 휘저으며 작은 게를 조곤조곤히 캐 먹는다. 그 옆으로는 진초록 맹그로브 숲이 수수히 펼쳐지고, 투명한 발리해의 해수면이 파란 하늘과의 경계를 지운다. 해산물을 먹는 원숭이의 우스꽝스러운 장면이 강렬한 자연색에 희석되어 현실로 다가온다.

풀라우 메라 & 풀라우 타부한
Pulau Merah & Pulau Tabuhan

© 김주원
© 김주원
© 김주원

바뉴왕이의 이웃 발리는 전 세계 서퍼와 배낭여행자의 천국으로 추앙받는다. 그렇다고 바뉴왕이의 해변이 거기에 뒤처지는 건 아니다.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지, 현지 서퍼는 바뉴왕이의 서핑 스폿에도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풀라우 메라도 그런 곳 중 하나다.

봉긋하게 솟은 섬 풀라우 메라가 꽤 적절한 장식처럼 자리를 잡고 있는 해변. 이곳은 확실히 서퍼가 사랑할 만하다. 넓고 아름다운 백사장, 그늘을 한껏 드리운 야자수, 왁자지껄한 현지인과 방문객, 영어로 갖가지 메뉴를 적어놓은 식당과 카페, 요란한 호스텔과 서핑 교습소. 상상하는 그대로의 서퍼 타운이다. 초보자가 연습하기 좋은 낮고 긴 파도가 주기적으로 포말을 일으키고, 여러 무리의 서퍼는 그 파도의 꼭대기를 잡기 위해 바다 위에 떠 있다. 활기가 깃든 목소리와 여유로운 표정은 이곳 사람들의 트레이드마크 같다. 이런 분위기에서라면 하루 종일 널브러져도 아무도 개의치 않는다.

온종일 휴식을 즐기기에 완벽한 또 다른 장소는 자바섬과 발리섬 사이에 떠 있다. 바뉴왕이의 동쪽 끄트머리 방스링 해변(Pantai Bangsring)에서 배를 타고 30여 분을 항해하면 풀라우 타부한에 닿는다. 구글 지도에 ‘Hidden Paradise(숨은 천국)’로 표기된 섬은 그저 고요하기만 하다. 바람과 파도 소리가 전부인 듯. 백사장과 산호로 둘러싸인 작은 섬은 늘그막한 오후 그 자체다. 남태평양 발리해와 자바섬의 실루엣이 섬 어디에서나 눈에 띄고, 보트 정박지 앞에 들어선 소박한 노점에선 채소 튀김을 접시에 담아내고 있다. 잠시 후 하늘색이 변하면 그 노점의 주인은 짐을 정리하고 집으로 돌아갈 작은 배에 오를 것이다.

허태우

피치 마이 매거진 발행인 겸 에디터
Publisher & editor for Pitch by Magazine

작가와 대화를 시작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