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스카치에 다다르는 길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출발해 애버딘과 스페이사이드를 거쳐 케언곰스 국립공원까지. 스코틀랜드의 자연과 스카치 위스키를 찾아나서는 여행.

고현
2021.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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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ad to the Essence of Scotch — 스카치에 다다르는 길

‘스카치’는 종종 최고의 품질과 우아한 품격을 대변하는 수식어로 여겨진다. 호박빛이 영롱하게 감도는 위스키나 완숙 계란에 황금 비율의 포스미트를 두른 스카치 에그, 체크 무늬 포장지로 세심하게 감싼 버터 캔디를 지칭할 때처럼. 이는 영국과 애써 구분을 지어야 직성이 풀리는 스코틀랜드인의 남다른 자부심과 고집스러운 기질 덕분일 것이다.
에든버러에서 출발해 애버딘과 스페이사이드를 거쳐 케언곰스 국립공원의 은밀한 골짜기를 순환하는 루트로 자동차 여행을 떠나보자. 혹자는 하일랜드 북단의 황량한 대지와 외딴 섬에서 경험하는 드라마틱한 모험이 누락된 게 아니냐고 항변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 길은 스코틀랜드 특유의 정체성, 다시 말해 스카치의 정수에 다다르는 여정과 다름없다. 독특한 문화와 숭고한 자연을 기대한 여행자에게 이보다 나은 대안은 없어 보인다.

글 고현
사진 최남용

에든버러
Edinburgh

© 최남용
© 최남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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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 앤드류 광장(St. Andrew Square) 모퉁이의 옛 스코틀랜드 왕립은행을 멋스럽게 레너베이션한 슈발 디 에든버러 그랜드에 체크인을 한 직후. 허기를 달랠 겸 호텔 4층의 레지스터 클럽(Register Club)으로 향한다. 접시에 푸짐하게 담긴 블랙 푸딩과 바삭하게 구운 허브 소시지 그리고 양의 내장으로 요리한 해기스(haggis)로 차려진 조식이 스코틀랜드에 도착했음을 실감하게 한다.
에든버러는 스코틀랜드의 수도임을 과시하려는 강박을 수시로 내비친다. 위풍당당한 화산암 위에 솟은 에든버러성(Edinburgh Castle) 앞에는 스코틀랜드 위스키의 모든 것을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공간 스카치위스키 익스피리언스(The Scotch Whisky Experience)가 자리하고, 일대 거리에선 스코틀랜드 국기 문양의 페이스 페인팅을 한 마임니스트가 관광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인파로 붐비는 로열 마일(Royal Mile)에선 그런 강박이 절정에 다다른다. 에든버러성에서 홀리루드하우스 궁전(Palace of Holyroodhouse)까지 1.6킬로미터가량 쭉 뻗은 이 길의 이름은 16세기 스코틀랜드 국왕이 성과 궁전 사이를 오간 것에서 유래했다. 오늘날 이 길에선 킬트를 차려 입고 백파이프를 연주하는 청년들이 영화로운 과거를 재현한다. 인근의 메리 킹스 클로즈(Mary King’s Close) 앞에는 호기심 넘치는 표정의 방문객들이 투어 가이드의 안내에 귀 기울이고 있다.
에든버러에서의 들뜬 분위기를 가라앉힐 겸, 칼턴 힐(Calton Hill)에 오르는 길. 느닷없이 잿빛 구름이 몰려들고 빗줄기가 제법 흩날리지만 동요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언덕에 도착한 순간 구름 사이로 햇살이 엷게 비치고, 포스만(Firth of Forth) 위로 무지개가 희미하게 드리운다. 반대편으로 시선을 옮기면 스콧 기념탑(Scott Monument)과 에든버러성의 검게 그을린 화강암 단면이 반짝인다. 찰나의 극명한 대비. 이는 마치 스코틀랜드의 기질을 드러내는 비밀스러운 신호처럼 보이기도 한다.

애버딘
Aberdeen

© 최남용

에든버러에서 포스 로드 브리지(Forth Road Bridge)를 건넌 지 얼마 지나지 않자 하일랜드에 진입했다는 사실을 인지한다. 엄밀하게 말해서 하일랜드는 스코틀랜드 남부의 에든버러, 글래스고 등 남부 평야 지대와 북서부의 섬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 영토를 아우르는 지명이다. A90 고속도로를 타고 점점 고도를 높여가는 하일랜드의 구릉지대를 2시간 30분 정도 달린 끝에 애버딘에 도착한다.

북해 석유 산업의 전진기지이자 ‘화강암의 도시’로 알려진 애버딘에는 반듯하게 구획된 거리를 따라 엇비슷한 외관의 석조 건물이 늘어서 있다. 이런 광경을 앞에 두고 여행 작가 빌 브라이슨(Bill Bryson)은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애버딘이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특별히 거슬리는 것이 너무 없어서 문제였다.”

빌 브라이슨의 표현은 절반 정도 맞는 것 같기도 하다. 런던 교외의 부유한 타운하우스를 연상시키는 유니언 스퀘어 쇼핑 센터(Union Square Shopping Centre) 부근을 지나 반듯한 신시가지 중심부로 들어서면 화강암 건물을 드문드문 채운 프랜차이즈 레스토랑이 여행자의 흥미를 반감시키니 말이다. 반면 북쪽의 올드 애버딘(Old Aberdeen)에선 신시가지와 전혀 다른 고색창연한 매력을 느낄 수 있다. 싱그러운 수목이 사방을 채운 애버딘 대학교(University of Aberdeen)의 고풍스러운 교정이나 세인트 마차스 대성당(St. Machar’s Cathedral) 앞에 깔린 자갈길에선 느릿느릿 마차가 지나가도 그리 어색해 보이지 않는다.

정작 애버딘을 찾은 여행자를 강하게 매혹시키는 순간은 따로 있다. 스코틀랜드 하일랜드에선 양과 소를 많이 기르는데, 그중 애버딘 남쪽의 앵거스(Angus) 지방에서 사육하는 검은 몸통에 털이 수북한 앵거스 소는 스테이크로 세계의 미식가를 단숨에 사로잡았다. 애버딘 도심의 평범한 7 스테이크하우스에서도 최상급 앵거스를 맛볼 수 있는 건 당연한 얘기. 육즙을 가득 머금은 앵거스 스테이크의 풍미는 여행의 활기를 대번에 끌어올린다.

슬레인스성
Slains Castle

© 최남용
© 최남용
© 최남용

스코틀랜드에서 운전을 하면 고성을 주유소만큼 자주 마주치게 된다는 얘기를 어느 정도는 신뢰해도 좋다. 문화유산 리스트에 등재된 고성의 수가 2,000개가 넘으니 말이다. 그중 애버딘 북쪽에 있는 슬레인스성은 일부러 찾아가지 않으면 발견하기 힘든 해상 절벽 끝에 자리한다. 다만 슬레인스성은 콜리스턴(Collieston)에 있는 올드 슬레인스성과 좀 더 북쪽의 크루든 베이(Cruden Bay)에 외떨어져 있는 뉴 슬레인스성, 두 곳이 있으니 헷갈리지 않도록 유의하자. 올드 슬레인스성은 사실상 성의 원형을 짐작하기 힘들 만큼 폐허로 남아 있다.

‘뉴’ 성이라 해도 그 역사는 지금으로부터 400년을 더 거슬러 오른다. 지역 영주 클랜 헤이(Clan Hay) 가문은 자신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 1597년 중세풍의 스코틀랜드 바로니얼 양식으로 이 성을 다시 지었다. 뉴 슬레인스성은 1925년 존 엘러먼 경(Sir John Ellerman)에 의해 전혀 다른 운명을 맞이하는데, 새 주인이 된 그가 세금을 면하기 위해 성의 지붕 전부를 헐어버린 것. 외벽과 내부 골조만 남아 형체를 겨우 알아볼 수 있는 슬레인스성은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그 기묘한 형상으로 방문객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성 입구에선 드라큘라 공연에 관한 안내문이 눈길을 끈다. 아일랜드 출신 소설가 브램 스토커(Bram Stoker)는 19세기 성주의 초청을 받아 이 성을 정기적으로 드나들었다. 당시 깊은 영감을 얻어 집필한 작품이 바로 〈드라큘라〉다. 성 한복판의 기하학적인 팔각 중정은 드라큘라의 성을 묘사할 때 고스란히 차용되기도 했다. 브램 스토커에게 영감을 준 슬레인스성은 얼마 지나지 않아 본연의 기능을 상실했지만, 오늘날 이곳을 찾은 이들은 여전히 쇠락한 성의 잔해가 남긴 서사를 끄집어낸다.

슬레인스성에서 문학적 상상력을 펼친 뒤엔 맥주로 목을 축이자. 스코틀랜드 최고의 크래프트 브루어리가 차로 불과 20분 거리에 떨어져 있다. 브루독은 2007년 설립한 비교적 젊은 브루어리로, 대범한 마케팅과 함께 빠른 속도로 스코틀랜드 각지의 펍을 평정했다. 다소 지루한 정통 맥주 문화를 고수하던 스코틀랜드에서 과감하게 아로마를 첨가한 브루독의 크래프트 맥주가 반향을 일으킨 건 꽤 의미심장한 일이다. 완고하지만 때로 과감할 것. 어쩌면 그게 스코틀랜드인의 기질일 수도 있으니.

스페이사이드
Speyside

© 최남용
© 최남용
© 최남용

스페이사이드는 본래 하일랜드에 속하지만, 강렬한 존재감 덕분에 별도의 지역으로 구분을 짓는다. 스코틀랜드 내 몰트위스키 증류소의 절반 가까운 50여 개가 이곳에 자리하니 그럴 만도 하다. 맥캘란, 글렌리벳, 글렌피딕 등 위스키 문외한이라도 한 번쯤 들어봤을 스타 증류소가 모두 이 일대에 모여 있다. 증류소마다 개성은 조금씩 다르지만, 스페이사이드 몰트위스키의 공통점이라면 ‘절묘한 균형’이다. 달콤한 꽃과 견과류의 향이 부드럽게 어우러진 풍미는 애호가의 고른 지지를 받는다. 강렬한 피트 향을 머금은 아일레이 위스키를 선호하는 이들조차도 몰트위스키의 본산지인 스페이사이드로 향하는 일을 일종의 성지순례로 받아들인다.

굽이굽이 지류를 형성한 160킬로미터 길이의 스페이강은 위스키 증류의 가장 중요한 원료다. 강물은 스페이사이드 일대의 보리 맥아가 뒤섞여 유독 어두운 빛깔을 띈다. 여기에 스페이사이드의 너른 들판에서 자란 보리를 건조한 맥아와 효모를 첨가하고 오크통에 숙성시켜 전설적인 몰트위스키가 완성되는 것이다.

스페이사이드를 처음 찾았다면 11곳의 증류소를 안내하는 몰트위스키 트레일을 참고해도 좋다. 더프타운(Dufftown)과 아벨라워(Aberlour), 엘긴(Elgin)을 아우르는 루트에는 스페이사이드의 대표 증류소가 고루 포함되어 있다. 우선 글렌리벳 증류소를 빼놓을 수 없다. 증류소 내에 마련된 널찍한 숍에서 위스키를 골라 시음을 청해보자. “미국과 유럽의 셰리 캐스크에서 각각 다르게 숙성한 한정판 몰트위스키입니다.” 글렌리벳 매니저의 세심한 설명을 들으며 시음을 하다 보면 수백 파운드를 호가하는 한정판 위스키일수록 풍미가 복잡미묘하다는 사실을 체감하게 될 것이다.

1865년 존 그랜트(John Grant)가 세운 이래 6대에 걸쳐 이어진 글렌파클라스(Glenfarclas)는 스코틀랜드에 얼마 남지 않은 가족 경영 방식의 증류소다. 검게 그을린 저장고 너머에는 현지인이 ‘위스키산’이라 부르는 벤 리네스(Ben Rinnes)가 굽어보고 있다. 글렌파클라스는 스페이사이드에서 규모가 작은 편에 속하지만, 숙성을 기다리는 위스키 캐스크는 3,500개가 넘는다. 안내 데스크 칠판에는 연도별 위스키 리스트가 꼼꼼하게 표기되어 있다. 마침 오늘 시음실에서 내어준 위스키는 1994년산. 숙성 연도까지 따지면 왠만한 청년의 나이보다 오래된 위스키를 마시는 셈이다.

케언곰스 국립공원
Cairngorms National Park

© 최남용

스페이사이드 남쪽의 케언곰스 국립공원(Cairngorms National Park)에 이르러서야 하일랜드를 여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하일랜드 여행 안내서를 들춰보면 국립공원에 할애된 페이지가 극히 일부에 불과할 만큼 비중 있는 여행지는 아니지만, 스코틀랜드 전체 면적의 10퍼센트를 차지할 만큼 광활한 규모를 자랑한다. 국립공원 한복판을 흐르는 디강(River Dee)과 그 주변에 어슬렁거리는 양 떼, 그리고 이따금씩 등장하는 마을이 목가적 풍경을 자아내는 곳이다.

국립공원과 동쪽 경계를 이루는 다이스(Dyce)에는 디사이드 글라이딩 클럽(Deeside Gliding Club)이 있다. 경비행기에 줄을 연결해 이륙을 시도하는 무동력 글라이더의 생경한 모습을 구경하기 위해 차를 잠시 정차한다. 1명만 탑승한 글라이더가 수백 미터 높이로 상승하더니 경비행기와 연결된 줄을 끊고, 상공을 가로지른다. “오늘은 바람이 좀 약한 편이에요. 기상 조건이 좋으면 무동력으로 1시간 가까이 비행을 할 수 있죠.” 아슬아슬하게 착륙을 마친 백발의 파일럿이 자신의 글라이더를 끌면서 말한다.

케언곰스 국립공원의 도로를 달리다 보면 이처럼 정차가 빈번하게 일어난다. 녹이 잔뜩 낀 외딴 주유소에도, 평원의 양지를 차지하고 있는 고성 앞에도, 까만 얼굴의 양 떼가 노니는 구릉 곁에도 어김 없이 차가 세워져 있다. 거친 황야와 가파른 능선을 이루는 산, 그 사이를 희미하게 파고드는 도로, 하늘을 낮게 부유하는 구름과 불시에 피어오르는 안개를 가만히 응시하는 것. 어쩌면 그것이 하일랜드에 가장 순수하게 다가서는 방법이리라. 그리고 스코틀랜드가 선사하는 가장 매혹적인 순간은 이처럼 몽환적인 광경을 앞에 두고 찾아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 최남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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