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 36시간 여행
바다의 산물을 내륙으로 운반하던 옛길, 산비탈에 펼쳐진 야생차밭, 실재와 허구를 오가는 평사리 들판, 강변의 새하얀 모래밭. 이 풍요로운 땅의 속 깊은 이야기를 찾아 하동 36시간 여행을 떠난다.
36 Hours in Hadong — 하동 36시간 여행
지리산과 섬진강 사이에 들어앉아 너른 평야를 가슴에 품은 하동은 구석구석 오랜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바다의 산물을 내륙으로 운반하던 옛길, 산비탈에 펼쳐진 야생차밭, 실재와 허구를 오가는 평사리 들판, 강변의 새하얀 모래밭 그리고 기이한 자태로 시선을 사로잡는 소나무까지. 이 풍요로운 땅의 속 깊은 이야기를 찾아 하동 36시간 여행을 떠난다.
글 표영소
사진 이규열
놀루와 협동조합 www.nolluwa.co.kr
놀루와 협동조합은 2018년 지역민과 여행자를 연결하기 위해 시작한 협동조합 형태의 주민 여행사다. 자연과 사람, 전통 등 지역 자원을 기반으로 여행과 지역 공동체 모두의 지속 가능성을 지향하는 것이 놀루와의 비전. 크게 체험, 답사, 인문, 액티비티, 4가지 콘셉트로 나누어 차와 전통주 시음부터 다원 순례, 섬진강 답사, 문학과 예술 여행, 금오산 집라인 체험 등 다양한 테마 여행을 선보인다. 매달 보름 즈음 평사리 백사장에서 열리는 ‘섬진강 달마중’ 행사는 놀루와의 대표 프로그램. 최근 한국관광공사 선정 야간관광 100선에 선정되기도 했다. 이번 기사는 놀루와에서 기획 · 진행한 창원자유학교 답사 여행에 동행해 취재했다.



Day 1 / 지리산 옛길 하이킹
14:30 서산대사 길
화개면에 속한 두 마을, 신흥에서 의신까지 이어지는 4.2킬로미터 길이의 산길을 걸으며 하동 여행을 시작해보자. 오늘날 부르는 명칭은 ‘서산대사길’. 조선 중기 의신마을에 위치한 원통암에서 출가한 서산대사(1520~1604년)가 걷던 길이라 해서 붙은 이름이다. 40여 년 전만해도 사람이 다니던 길이었으나, 산길과 나란히 아스팔트 도로가 들어서면서 한동안 방치된 것을 7년 전 지리산 옛길로 복원했다. 한때 보부상이 하동 화개장터에서 내륙으로 소금을 운반하던 길이라 ‘소금길’이라 부르기도 했다고. 서산대사길은 화개초등학교 왕성분교와 신흥교 사이에 난 계단을 오르면서 시작한다. 도중에 서산대사가 왜병으로부터 의신사 범종을 지키기 위해 도술을 부려 의자로 바꿔버렸다는 의자바위를 볼 수 있고, 중간중간 계곡이 가까워지면 여지없이 기온이 낮아져 땀을 씻어주곤 한다. 걷는 내내 들리는 시원한 물소리만으로도 잠시나마 바깥 세상의 소란스러움을 잊기엔 부족함이 없지만, 잠시 물가로 내려가 발을 담근 채 더위를 식힐 수도 있다. 산자락을 따라 오르락내리락하며 2시간 남짓 지났을까. 옛길은 의신마을 내에 위치한 반달곰 생태학습체험장 베어빌리지로 들어서며 끝이 난다. 운이 좋다면 울타리 너머로 지리산 반달곰이 심드렁한 인사를 건넬지도 모른다.
신흥마을 — 의신마을 4.2km, 2시간

17:00 콩사랑차이야기
하동 십리벚꽃길 시작되는 지점에 위치한 콩사랑차이야기는 현지인이 적극 추천하는 맛집이다. 국산콩 100퍼센트로 만든 두부를 사용하는데, 담백하고 고소한 맛에 자꾸 손이 간다. 두부 맛을 제대로 느끼려면 두부 백반이 낫고, 살이 통통한 꽃게가 넉넉하게 들어가 진한 국물 맛을 자랑하는 꽃게된장찌개도 훌륭하다. 푸짐한 밑반찬과 다른 곳에선 쉽게 맛볼 수 없는 산초김치 역시 별미. 서산대사 길이 끝나는 의신마을에서 13.5킬로미터 (차로 25분) 거리다.
주소 : 하동군 화개면 탑리 626-1
두부백반 9,000원, 꽃게된장 1만 원

20:00 너른마당 펜션
평사리 벌판에서 지리산 방면으로 악양면 깊숙이 7킬로미터가량 더 들어가면 지리산 남쪽 자락에 자리 잡은 너른마당 펜션이 나온다. 해발 350미터의 고지대라 아래 마을과 주변 풍광은 물론 공기마저 다르게 느껴진다. 객실은 본채 2층과 별채로 나뉘고, 수영장, 바비큐 시설, 가마솥 아궁이 등도 이용할 수 있다. 이름처럼 널찍한 마당 곳곳에 주인 부부의 정성스러운 손길과 애정이 배어 있다.

Day 2 / 야생차밭에서 배우는 쉬운 다도
09:30 혜림농원
하동은 우리나라 최초로 차나무를 심은 곳이다. 국내 차 문화의 뿌리를 찾는다면, 아마도 차 시배지(始培地)로 지정된 화개면 쌍계사 일대가 될 것이다. 혜림농원 역시 이곳에 있다. 수확한 찻잎이나 차밭에서 필요한 물품을 손쉽게 운반하기 위해 농업용 모노레일이 설치돼 있을 만큼 가파른 산비탈(해발 300미터)에 펼쳐진 야생차밭이다.
차밭을 옆에 끼고 구불구불한 산길을 오르는 동안 혜림농원을 운영하는 구해진 대표가 새빨간 보리수 열매, 산앵두, 고사리, 젠피나무, 산초나무 등 곳곳에서 자라는 생명 하나하나 허투루 지나치지 않고 상세히 알려준다. 하동에서 태어난 그는 차 농사를 지은 부모님과 쌍계사의 ‘청파 영감’을 가까이에서 보고 자란 어릴 적 영향으로 차 재배에 뛰어들었다. 혜림농원의 차는 자연농법으로 재배하고, 찻잎을 일일이 손으로 따고 덖어 만든다. 구 대표의 철학은 단순하다. ‘주는 만큼 받는다.’ 차나무가 자라는 땅에 아카시아꽃, 죽순, 해초류, 쑥, 미나리 등으로 직접 만든 효소를 뿌리는 것도 같은 이유다. 차밭 꼭대기, 화개면이 내려다보이는 정자에서 펼쳐진 찻자리 역시 복잡하고 엄격한 다도의 격식 대신, 보다 많은 사람이 좀 더 쉽게 좋은 차를 접할 수 있는 방법을 택했다.
목적에 맞게 제조 공정을 거친 녹차는 일반 녹차보다 찻잎이 살짝 크다. 흔히 사용하는 커피용 드리퍼에 찻잎을 넣고 뜨거운 물을 붓는 것으로 끝. 그렇게 우려낸 차는 은은하고 맑은 맛이 특징이다. “좋은 마음으로 만들어야 좋은 차가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그 차를 마시는 사람도 맑고 건강해지면 좋겠고요.” 구 대표가 건넨 차를 한 모금 맛보면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주소 : 하동군 화개면 차시배지길 12-18

11:00 정금차밭
차 시배지에서 출발해 2.7킬로미터 길이로 이어지는 차밭천년길은 정금차밭에서 끝난다. 야트막한 비탈을 올라 차밭 정상에 서 있는 정자에 이르면 발 아래로 온통 초록빛 물결이다. 12만제곱미터 면적의 정금차밭은 하동군에서 직접 조성하고 관리하는 곳으로, 탁 트인 경사면을 따라 펼쳐진 차밭 너머로 화개천과 주변 마을, 지리산 주능선을 비롯해 백운산, 황장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하동에서 손꼽을 만한 차밭 전망대이자 촬영 스폿인 셈. 창원자유학교 답사 여행의 일정으로 정금차밭을 찾은 날에는 김지희 해금 연주자의 깜짝 공연이 펼쳐졌는데, 시원한 산바람과 함께 공중으로 퍼져 나가는 애절한 해금 소리가 한낮의 후덥지근한 열기를 순식간에 식혀준다. 정자에 올라 주변 경치를 감상해도 좋지만, 기왕이면 차밭 고랑으로 걸어 들어가 기념사진을 남겨보자.
주소 : 하동군 화개면 정금대비길 11

하동의 숨은 소나무 찾기
14:00 소나무 투어
하동에서도 가장 오래된 마을로 꼽히는 상신마을 일대에 유명한 것이 세 가지 있다. 하나는 마을의 집과 밭 주위를 감싼 야트막한 돌담, 다른 하나는 마을 어귀에 자리한 조씨고가. 마지막은 십일천송이다. 상신마을 문화탐방로를 따라 마을 너머 계속 걷다 보면 어느 순간 거대한 소나무가 시야에 들어온다. 가까이 다가가기 전까지는 분명 한 그루처럼 보이는데, 나무 그늘 안으로 들어서면 크기와 모양이 제 각각인 11그루의 소나무 기둥이 모습을 드러낸다. 수령은 250년에서 300년 사이. 소나무가 자리한 노전마을의 수호나무로 지정돼 있다.
여기서 4킬로미터 떨어진 대축마을에는 그보다 유명세를 치른 소나무가 있다. 마을 뒤편아미산 중턱, 거대한 바위 위에 뿌리내린 문암송(천연기념물 제 491호)이다. 맞은편 문암정 아래 서서 올려다보면 600여 년의 무게가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생명력에 일단 기가 눌린다. 바위 틈을 비집고 뿌리를 내린 동시에 그 뿌리로 바위 자체를 감싼 모습.
경사면을 올라 나무 기둥 뒤편에 서면 문암송의 기품 있는 자태에 다시 한 번 감탄하게 된다. 그 너머로 펼쳐지는 악양의 풍요로운 벌판, 첩첩이 이어진 산자락을 마주하면 문인 문객이 이곳을 사랑한 이유 또한 금세 알 수 있다.
악양면 소나무 투어는 평사리 들판에서 마무리된다. 들판 한가운데에 나란히 서 있는 두 그루의 소나무는 ‘부부송’이라는 이름으로 이곳의 상징물이 됐다. 소설 〈토지〉의 배경이다 보니 주인공의 이름을 따 ‘서희’와 ‘길상’ 나무라고 부르기도 한다. 모를 심은 지 이제 일주일. 물이 찰랑거리는 들판이 하루가 다르게 모습을 바꾸는 동안 이들이 허수아비처럼 지켜줄 것이다.
십일천송 : 하동군 악양면 매계리 276
문암송 : 하동군 악양면 대축길 91
부부송 :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길 44

〈토지〉가 평사리에 남긴 것
16:00 최참판댁
하동에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사람일지라도 ‘평사리’라는 지명이 낯설지 않은 것은 순전히 박경리 작가의 〈토지〉 덕분이다. 소설이나 동명의 드라마 때문에 너른 들판이 전부인 이곳까지 걸음하는 외지인을 위해 2001년 하동군에서 소설 속 가상의 공간인 최참판댁을 재현해 놓았다. 별당채, 사랑채, 안채를 포함해 14개동 99칸으로 이루어진 내부는 ‘만석꾼’의 집다운 규모. 2004년 촬영한 작품을 비롯해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 세트장으로도 사용되기도 했다. 얼추 흉내만 낸 관광지가 아니라, 공들여 짓고 잘 관리해온 흔적이 엿보이는 까닭에 당시의 생활상을 엿보고 오늘날 차관급에 해당하는 ‘참판’의 지위를 짐작하는 데 무리가 없다. 여기에 사랑채를 지키는 명예 최참판의 존재가 현실과 문학을 넘나드는 상상의 여행을 한층 실감나게 만들어준다.
주소 :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길 66-7


17:00 평사리 백사장
모래가람, 모래내, 다사강(多沙江)…. 고려 우왕 때 강 하구를 통해 왜구가 침입하자 두꺼비 떼가 울어 이를 막았다는 전설이 있기 전, 섬진강의 옛이름은 하나같이 강변의 고운 모래를 자랑한다. 평사리공원 앞에 펼쳐진 백사장은 부드러운 모래밭을 맨발로 걸어보고 전라남도, 전라북도, 경상남도에 걸쳐 600리를 흐르는 섬진강에 발을 담글 수 있는 곳. 멀리서 내려다볼 땐 흐르지 않는 강처럼 보이는데, 가까이 다가가니 물살이 빛에 반사돼 반짝인다. 산세가 굽이진 지형을 따라 흐르는 섬진강은 강폭이 그리 넓지 않고 유속도 센편이 아니다. 주변 풍광 역시 느긋하고 부드러운 기운이 감돈다. 매월 보름달이 뜰 즈음 이곳 백사장은 놀루와에서 진행하는 ‘섬진강 평사리 달마중’의 무대가 된다. 초롱불과 종이배, 시 낭송 등 아날로그적 감성으로 가득한 행사. 피아니스트 지용의 베토벤 월광곡 연주와 강강술래 등의 프로그램이 더해진 6월 달마중에는 코로나 여파에도 무려 400여 명이 참가했다고 한다.
주소 :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97-3

19:00 매계마을 잭살할매밥상
악양면 매계마을 마을회관은 마을 주민을 위한 공간인 동시에 마을에서 직접 운영하는 공동 식당이다. 마을에서 직접 재배한 나물로 부녀회가 요리한 나물 반찬은 푸드 마일리지 제로. 식자재의 신선함과 손맛이 더해져 끊임없이 리필을 부른다. 진정한 로컬 밥상을 경험하며 현지인과 좀 더 가깝게 소통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상시 운영하는 식당이 아니므로, 보통 마을 연계 프로그램을 통해 경험할 수 있다. 방문 전 마을에 문의는 필수.
주소 : 하동군 악양면 매계1길 24-3
매화가 피는 계곡이라는 뜻의 매계마을은 강훈채 이장을 중심으로 ‘마을 공동체’의 모범 답안을 만들어가는 중이다. 원주민과 귀농인이 조화롭게 어울리고, 주민들의 자발적 참여로 다양한 마을 활성화 사업을 시도한다. 앞으로 마을 레스토랑과 마을 호텔도 운영할 예정이라고.

Day 3 / 한국식 커피는 사발에 마신다
09:30 양탕국 커피문화마을
우리나라에 커피가 전파되기 시작한 19세기 후반 양탕국은 가비, 가배와 함께 커피를 부르는 명칭 중 하나였다. 서양에서 들어온 탕국이라는 뜻이다. 양탕국 커피문화마을은 우리나라 고유의 커피 문화를 만들어가기 위해 조성한 곳으로, 양탕국카페관과 교육관, 로스팅 체험장, 야외 공연장, 펜션 등의 시설이 지리산 자락에 안긴 모양새로 옹기종기 모여 있다. 이곳의 대표 메뉴인 사발 커피는 내리는 방식이 독특하다. 곱게 분쇄한 커피 가루에 곧장 일정량의 뜨거운 물을 붓고 20초 정도 우린 뒤 드리퍼에 거르는 우림법을 개발한 것. 그렇게 우린 커피는 서양식 커피잔이 아니라, 대한제국의 민중이 그러했듯 사발에 따라 마셔서 ‘사발 커피’다. 물의 온도, 물줄기의 굵기, 물을 붓는 횟수 등 사소한 것까지 세밀하게 따지는 일본식 핸드 드립에 익숙해 있는 사람이면, 기함할지도 모를 일. 이곳에서 운영하는 체험 프로그램에 참여해보자. 직접 볶은(로스팅)신선한 원두로 심플하게 우려낸 사발 커피 한 모금이면 지금까지 ‘정석’이라고 믿었던 것이 고정관념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
주소 : 하동군 적량면 공드림재길 155
Side Trip 1 : 스타웨이하동
하동을 끼고 지나는 섬진강 줄기와 83만여 평 평사리 벌판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전망대가 지난 해 문을 열었다. 고소성 바로 아래 위치한 스타웨이하동은 하동을 방문했다면 반드시 거쳐가야 할 핫스폿. 스릴을 즐기며 경치를 조망할 수 있는 별 모양의 스카이워크 외에도 빈백 소파가놓인 계단식 데크와 카페, 레스토랑을 갖췄다.
Side Trip 2: 여여식당
섬진강 재첩을 맛볼 수 있는 여여식당은 관광객과 현지인 모두 즐겨 찾는 곳이다. 뽀얀 제첩국은 시원한 국물 맛이 일품이고, 함께 나오는 생선 조림과 꼬막 무침, 각종 나물 등 10여 가지의 반찬도 하나같이 맛있다. 회무침과 덮밥, 전으로도 제첩을 즐길 수 있다.
주소 : 하동군 하동읍 경서대로 92
재첩국백반 1만 원